[공동취재=정병수·박천행·유종·박관섭 기자] 전남 무안군 일로읍 복룡리 회산마을. 지금 이곳은 인의산을 앞으로 바라보며 펼쳐진 일로 평야의 안쪽으로 회산연꽃방죽이 있는 평온한 농촌 풍경을 내보이고 있다. 그러나 연꽃방죽 위의 회산 중턱에서 발아래로 굽어보는 듯한 관해정(觀海亭)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면, 우리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깊은 시선과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가 한자리에 겹쳐져 있음을 발견한다. 그렇듯이 이곳은 단순히 풍광이나 풍류를 즐기기 위한 그런 정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무안의 멋과 얼이 담긴 공간인 것이다.
무안 선비의 꿈, 관해정에 깃들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몽촌(夢村) 임타(林㙐, 1593-1664)는 상주목사라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나주 회진에서 배를 타고 이곳 일로 회도로 내려와서 초당(草堂)을 지었다. 그가 정자를 세운 1660년 무렵에 이곳은 조수가 드나드는 바닷가의 언덕이었다. 그 무렵 그가 지은 시는 이곳의 당시 풍광을 생생히 전해준다.
지경이 궁벽하여 진세에 벗어나고 (境僻超塵世)
다락이 높아서 반천에 솟았도다 (樓高半入天)
이미 능히 부인을 버렸는데 (己能抛符印)
어찌 다시 초선을 사랑하리오 (寧復戀貂蟬)
그가 이 시에서 ‘부인(符印)’ 즉 관리의 도장과 관리의 관모인 ‘초선(貂蟬)’을 모두 버리고 은일한 것은 단순히 관료로서의 삶에 염증이 나서만이 아니었다. ‘지경이 궁벽하지만’ 그리하여 속세의 티끌을 털어버린 자리에서 바라보는 바다, 당시 영산강 하구로 밀려드는 바닷물의 밀물과 썰물을 통해 유한한 인간의 삶과 욕망을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공간을 선택한 것이었다.
본래 이 정자는 3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 와가로 12개의 기둥마다 시구가 써진 주련이 걸려 있었으며, 특히 현판 글에는 한글 번역까지 곁들여져 있어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대중의 이해를 돕고자 한 배려가 엿보인다. 현재의 정자는 원형이 소실되어 2009년에 복원한 것으로 비록 지금은 바다가 보이지 않지만, 당시 바다를 바라보며 느꼈을 적막감과 초연함을 여전히 상상하게 한다.
바다를 바라보던 정자가 바라보는 것
그런데 이곳에 서면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관해정(觀海亭)’이라는 이름은 ‘바다를 바라보는 정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아도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임타가 바라보던 바다는 어디로 갔을까?
정답은 이곳의 옛 지형에 숨어 있다. 관해정이 자리한 일로읍 복룡리 일대는 본래 영산강 하류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 파고드는 ‘회도(回島)’ 또는 ‘회산(回山)’의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강 하구에서 밀려오는 바닷물은 이곳에서 거꾸로 역류하여 마치 바다를 품은 듯한 풍광을 빚어냈다.
또한 무안이라는 지역 자체가 ‘물아혜’ 또는 ‘물안골’이라고 불리는 연화부수(蓮花浮水)형 갯벌이 무안반도 삼면에 걸쳐서 펼쳐져 있다. 밀물과 썰물이 드는 ‘물때’에 따라 바다와 땅의 경계가 바뀌는 신비로운 장소였다. 이러한 지리 문화적 생태계가 대표적으로 펼쳐지는 곳이 일로 회산 일대였으며, 임타는 바로 이 바다와 땅이 맞닿아 밀물과 썰물에 따라 하루에도 두 번씩 풍경이 달라지는 역동적 경관에 심취하여 ‘관해정’이라 명명한 것이다.
그러나 근현대에 이르러 이 풍광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일제강점기 무안군 일로읍 지역에 조성된 ‘영화농장(榮和農場)’이 있었다.
영화농장, 일제강점기 간척 사업의 주요 거점
일본인 히또미 로쿠타로(人見鹿太郞)는 1925년경, 무안군 일로읍 회도(回島)와 돈도리 일대의 드넓은 갯벌을 주목했다. 당시 일본제국은 조선을 ‘곡창지대’로 삼아 쌀과 면화 등을 수탈하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영산강 하구의 방대한 간석지는 가장 매력적인 개척 대상이었다.
히또미는 세 차례에 걸친 간척 사업을 단행했다. 회도와 돈도리 일대의 흙을 이용해 제방을 쌓아 바닷물이 드나드는 길목을 막았다. 인부들의 노동력을 독려하기 위해 두 그룹으로 나누어 돼지 10마리를 상품으로 걸고 경쟁을 붙였다는 기록은, 당시 간척 현장의 처절한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그렇게 해서 조수가 드나들던 자연의 갯벌이 인공의 농지로 탈바꿈했다.

‘에니와(へいわ)’ 곧 ‘영화(榮和)’라는 농장 이름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기독교적 의미에서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히또미가 기독교 신자였던 점과 관련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영광과 평화’는 어디까지나 식민지 주인을 위한 것이었다. 영화농장에서 생산된 곡식과 면화 그리고 인근 바다의 해산물은 상당량이 목포항 등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일제의 수탈을 위한 거점 중 하나로 기능했다.
상전벽해, 그 후의 풍경
간척으로 갯벌은 사라졌고 바닷물은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회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었다. 원래 ‘섬’이라는 뜻의 ‘도(島)’자를 쓰던 지명은 ‘마을’을 뜻하는 ‘회산(回山)마을’로 그 성격을 바꾸었다. 돈도리 일대는 간척 공사에 동원되었던 인부들이 모여 살면서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고, 간척 후에는 황새가 많이 모여들어 ‘황새밥통’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하지만 새로 조성된 땅은 갯벌 특유의 강한 염분(간기)를 머금고 있어 농사를 짓기에 쉽지 않았다. 히또미는 간기를 빼기 위해 근처인 몽탄의 파군다리에서 물을 끌어와 평지였던 회산 평야에 저수지를 만들어서 한곳에 모았다. 그렇게 해서 인공의 ‘회산방죽’이 탄생했고, 이것이 지금의 ‘회산백련지’이다.
그러나 농업 환경은 여전히 열악했다. 물이 부족해 인력으로 물을 끌어다 쓰는 천수답(天水畓) 형태였으며, 해방 이후에도 생산성은 현저히 낮았다. 당시 일로의 주요 농경지였던 ‘도장포뜰의 한 방구값이 영화농장의 세 방구값에 해당할 정도’라는 말이 전해질 만큼, 이 땅은 외형만 농지였을 뿐 척박한 땅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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