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취재=정병수·박천행·유종·박관섭 기자] 여름날 관해정에 올라 바라보면, 파란 바다 대신 초록 잎과 흰색 꽃이 어우러진 연꽃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리하여 이 풍경은 단순한 생태 관광지라는 외면의 모습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곳은 자연의 변화보다 더 극적인 역사의 격변(激變)을 목격한 증인의 시선을 지니고 있다. 일제의 침탈로 인한 ‘경관의 폭력적 변화’와 그 상처 위에서 다시 꽃을 피우려는 ‘회복의 의지’가 공존하는 장소인 것이다.
사미(四美), 관해정이 품은 이상
관해정을 들어서면 왼편에 서 있는 비석의 관해정기(觀海亭記)에서는 이 정자를 가리켜 ‘양신(良辰)·미경(美景)·상심(賞心)·낙사(樂事)의 사미(四美)를 고루 갖춘 선경고루(仙境高樓)’라고 평했다. 이 ‘사미’라는 말은 중국 남북조 시대 유송(劉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지은 〈위왕수정중집서(擬魏太子鄴中集序)〉에서 처음 나온다.
“천하에 좋은 날[良辰], 아름다운 경치[美景], 기쁜 마음[賞心], 즐거운 일[樂事]이 갖추어지기 어렵네. 이 네 가지가 함께 모이는 일은 드물고, 또한 쉽게 만나지 못하네.”
즉, 좋은 계절이나 날씨(良辰), 아름다운 풍경(美景), 감상하는 즐거움 또는 마음 맞는 사람(賞心), 실제로 즐거운 사건(樂事), 이 네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뜻이다. 훗날 이 네 가지는 특히 동아시아 문인들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풍류와 완상(玩賞)의 완전한 조건으로 굳어졌고, 당나라 왕발(王勃)의 유명한 〈등왕각서(滕王閣序)〉에서도 이런 표현이 보강되어 인용된다.

그런데 관해정은 이 네 가지가 모두 갖추어진 드문 장소였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그 네 가지를 찾을 수 있을까? 관해정 경내를 천천히 거닐면서 이를 그려본다.
첫째, 좋은 날(良辰). 관해정에 오르는 날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봄에는 연꽃방죽에 연둣빛 새순들이 오르고, 여름에는 백련이 만발해 은은한 연향이 온몸을 감싼다. 가을에는 평야의 곡식들이 누렇게 익고, 겨울엔 차가운 바람이 정자 기둥 사이를 스치며 휘파람 소리를 낸다. 물론 해가 뜨는 아침이나 안개가 걷히는 오전, 노을이 지는 저녁과 달빛이 연못에 잠기는 밤은 그대로 몽촌(夢村)이라고 스스로 명명한 임타 공의 그때나 지금이나 여일한 좋은 날이다.
둘째, 아름다운 경치(美景). 비록 임타가 보던 바다는 사라졌지만 그 바다가 남긴 풍광은 여전하다. 관해정에서 바라보는 회산백련지는 여름이면 온통 연꽃의 향연이다. ‘접근 금지’라는 팻말 없이도, 사람들은 절로 발걸음을 조심하게 되는 신성한 풍경이기도 하다. 좌우로 승달산과 은적산 그리고 앞으로 인의산을 불러들여 그 너머로 굽이쳐 흐르는 영산강의 물소리를 배경으로 펼쳐진 일로평야의 풍경은 관해정에 이르러 그 품새를 완성한다. 이 풍경은 임타가 읊었던 ‘반천에 솟은 누각’의 시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셋째, 기쁜 마음(賞心). 이 ‘상심’은 감상하는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하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임타는 이 정자에 홀로 앉아 시를 읊기도 했지만, 더 자주는 회산 너머 몽탄의 신흥마을에 취련당을 지어서 거주하던 동생 동리 임위(東里 林瑋, 1597~1668)를 만났다. 취련당에서 울리는 소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동생을 생각할 정도로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현재 관해정 왼편에는 형제송으로 불리는 소나무 두 그루가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있다. 그리고 또한 임타는 당대의 명사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주고받았다. 계곡 장유가 그와 자리하여 “오늘 밤은 정말 특별히 유다른 밤, 하늘 끝 낯선 땅 옛 친구를 만났도다(今夕知何夕 天涯見故人)”라고 읊었다. 이처럼 기쁜 마음은 벼슬자리나 큰 사업 등에서 만나는 인연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일상과 예술을 나누는 벗에게서 나는 것이었고, 바로 이 정자에 그것들이 있었다.
넷째, 즐거운 일(樂事). 임타에게 ‘즐거운 일’이란 무엇이었을까? 물론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삶의 방식이다. “좋은 날이라 생각되면 홀로 나아가, 지팡이를 꽂아 놓고 김을 매고, 동쪽 언덕에 올라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맑게 흐르는 물가에 나아가 시를 읊었다.”라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처럼, 그는 이 정자를 매개로 자연과 하나 되어 사는 일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또한 그에게는 동생과 손을 잡고 이 정자에 오르는 일, 후학을 가르치는 일, 그리고 자신이 남긴 시가 후세에 전해질 것이라는 믿음 자체가 오롯한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무안의 멋, 사미(四美)를 넘어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사미’는 사영운과 왕발, 그리고 임타가 꿈꾸던 이상적 풍류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해정은 여기에 더해서 또 하나의 ‘미(美)’를 갖추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전벽(轉變)의 미’ 또는 ‘역사적 긴장의 미’ 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이곳은 바다였다가 땅이 되었다. 조선 선비의 풍류터였다가 일제의 수탈 현장이 되었다. 척박한 간척지였다가 연꽃이 만발한 관광지가 되었다. 이 모든 변화가 한 자리, 한 정자 아래에 켜켜이 쌓여 있다. 관해정은 이러한 무안의 멋을 가장 잘 간직한 장소이다.
무안의 멋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광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하는 역사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상처 위에 꽃을 피우며, 과거를 왜곡하지 않고 기억하는 힘이다. 관해정 아래에는 영화농장의 논둑이 아직 남아 있고, 회산백련지 물속에는 일제가 쌓은 제방의 흔적이 잠겨 있다. 물론 협궤열차가 다녔던 기억도 있다. 우리는 연꽃을 감상하면서도 그 물속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서울시장을 지냈던 약천 조순이 현판에 썼던 시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관해정 새 정자에 저녁 빛이 비친다 (觀海亭新映夕暉)
굽이져 흐르는 먼 물결에 푸른 파도 가득하네 (邃迤遠水綠波澈)
그 당시 형제분이 소요하시던 곳 (當年兄弟盤桓處)
두 분이 손잡고 오시는 모습 보는 것 같네 (如見兩公携手歸)
조순이 본 것은 임타와 임위 형제의 우애만이 아니었다. 그는 한 정자가 품을 수 있는 시간의 깊이를 보았다. 저녁 빛살(夕暉) 속에서 그는 과거의 두 사람이 손잡고 오는 환영을 보았다. 이는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역사가 현재에 살아 숨 쉬는 순간이다.
무안의 얼을 찾아서
답사를 마치고 관해정 아래 회산백련지의 경내를 따라 걸었다. 이 땅의 역사는 때로는 선비의 붓끝처럼 잔잔하고, 때로는 일제의 간척하는 삽질처럼 거칠며, 때로는 해방 후에 남은 일로 사람들의 애환처럼 깊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듯이 관해정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광으로 남는 정자가 아니다. 이곳은 한 선비의 은일과 풍류가 시작된 곳이자, 일제강점기 수탈과 간척의 현장이었으며, ‘회도’에서 ‘회산’으로, ‘바다’에서 ‘연꽃방죽’으로 변모하는 상전벽해의 역사적 징표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신·미경·상심·낙사’의 사미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역사의 무게’라는 다섯 번째 아름다움까지 더한 무안만의 특별한 장소이다.
관해정을 찾아 ‘바다를 보는 정자’에서 더 이상 바다가 보이지 않는 풍경을 바라보며, 우리는 더 깊은 역사의 바다와 그 바다와 땅을 껴안고 살아가던 이들을 보아야 한다. 일제의 간척이 남긴 영화농장의 흔적, 천수답과 갯벌의 궁벽함을 기억하며, 그 위에 다시 핀 연꽃의 의미를 묻는 것. 거기에 무안의 진짜 멋과 얼이 스며있다.
무안의 멋과 얼은 ‘사미’가 갖추어진 완전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완전함이 깨어지고 다시 회복되는 과정 안에 있다. 바다는 사라졌지만 연꽃이 피었고, 식민지 농장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마을이 들어섰다. 관해정은 그 모든 명멸하는 ‘물 때’의 흔적을 품고 오늘도 묵묵히 서 있다.
우리는 그 앞에서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정자는 말없이 바람 소리만 보낼 뿐이다. 그 풍경과 바람결 속에 무안의 멋과 얼이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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