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숙경 사장이 춘향골의 역사와 추어탕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진=임구빈
중문을 들어서면 일본식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건너야 안채에 닿을 수 있다. 사진=임구빈

[공동취재=최점주·임구빈·이병삼 기자] 무안 청계면 ‘춘향골’무안군 청계면의 한적한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고즈넉한 한옥 한 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빼곡하게 들어선 나무 사이로 돌담이 이어지고, 정원 한편에는 두 개의 연못이 자리해 운치를 더한다.식당이라기보다 오래된 외갓집에 들어선 듯한 풍경이다. 이곳이 20년 넘게 남원식 추어탕을 끓여온 ‘춘향골’이다.

지난 19일 춘향골에서 소숙경 사장을 만났다. 한옥에 얽힌 사연부터 식당을 시작하게 된 계기, 한결같은 맛을 지키기 위해 들이는 정성과 손님들과 쌓아온 추억까지 20년 세월에 담긴 이야기를 들었다.

우연이 만든 인연, 식당이 된 한옥

춘향골의 시작은 뜻밖의 권유에서 비롯됐다.

소숙경 사장이 목포에서 무안으로 이주한 것은 1999년이다. 지금의 한옥을 매입해 보수하던 중 지나가던 사람이 “골프장 가는 길목이니 식당을 해보라”고 권했다.

처음부터 식당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미장원을 운영했던 소 사장은 당초 이곳에 스몰웨딩홀을 구상했다. 하지만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한 딸의 교육비를 마련해야 했고, 비교적 적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식당으로 계획을 바꿨다.

1년여 동안 기와와 옹벽, 돌담 등을 손질하며 한옥을 식당으로 꾸몄다. 그렇게 2000년 3월, 춘향골의 문을 열었다.

메뉴는 남원식 추어탕으로 정했다. 낙지와 한우 등 무안을 대표하는 먹거리와 차별화된 음식을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소 사장에게 요리 경험은 없었다. 그는 남원에서 35년간 추어탕집을 운영해온 친척을 직접 찾아가 전통 남원식 조리법을 배웠다. 남원까지 오가며 익힌 손맛이 춘향골 추어탕의 출발점이 됐다.

개업 초기에는 인근 무안CC를 찾는 골퍼들이 주요 손님이었다.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 광주 등지에서 골프장으로 향하는 차량이 이 길을 많이 이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식당도 알려졌다.

추어탕과 메기전골이 입소문을 타면서 손님이 늘었고, 우연한 권유로 시작한 식당은 어느덧 20년 넘게 자리를 지키게 됐다.

시간을 품은 고택

춘향골의 매력은 음식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식당을 감싸고 있는 오래된 한옥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한옥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개량한옥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이후 광주에서 건물의 부재를 해체해 이곳으로 옮겨와 다시 지었다.

한옥이 들어선 자리는 과거 계단식 논이었다. 당시에는 집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한옥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간척으로 그 풍경이 사라졌지만, 한때 무안에 기관장이 새로 부임하면 꼭 한 번 들르던 곳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원도 이채롭다. 화초와 정원수가 빼곡한 일본식 정원으로 꾸며졌으며, 우리나라와 일본의 지형을 본떠 만든 두 개의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네모난 기둥을 사용한 건축양식에서도 당시의 시대적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고택의 규모는 약 2,000평에 이른다. 과거에는 철대문과 중문이 있었고, 철대문 안쪽에는 초가집도 있었다고 한다. 초가집에서 중문으로 이어지는 계단 양쪽에는 꽝꽝나무가 늘어서 있었으며, 정원 곳곳에는 다양한 나무와 화초가 자리했다.

이 한옥 역시 한 사람의 역사만 품고 있지는 않다. 광주에서 건물을 옮겨온 주인부터 1980년대 중반부터 1999년까지 이곳에 법당을 차려 점사를 보던 주인까지 여러 사람의 삶이 머물렀다.

소 사장은 1999년 이 한옥을 매입한 뒤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식당을 열었다. 이후 20년 넘게 이곳을 지켜오며 한옥과 함께 자신의 삶도 이어왔다.

기둥에 새겨진 세월

한옥 안으로 들어서면 곳곳에서 세월의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주요 목재는 홍송을 사용했고, 일반적인 전통 한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둥근 기둥과 달리 네모난 기둥을 세웠다.

건물을 해체하고 옮겨 짓는 과정에서 생긴 부재의 연결 흔적도 남아 있다. 소 사장이 보수 과정에서 옻칠을 벗겨내자 목재에 새겨진 글씨가 모습을 드러냈고, 나뭇잎을 정교하게 새긴 목조 문양과 본채를 떠받치는 굵은 대들보도 눈길을 끈다.

오래된 나무와 기둥, 대들보는 이 집이 지나온 시간을 말없이 보여준다. 건물의 이력뿐 아니라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의 삶까지 품고 있는 셈이다.

고택을 관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오래된 한옥의 누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와를 손질하고, 언덕배기의 토사 붕괴를 막기 위해 옹벽도 꾸준히 보수해야 했다. 좁은 진입로 때문에 2.5톤 트럭을 구해 건축자재를 직접 실어 나른 적도 많았다.

정원수를 전정하고 화초를 가꾸며 잡초를 제거하는 일도 소 사장의 몫이다.

5시간의 정성이 만드는 추어탕

춘향골의 대표 메뉴인 추어탕은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완성한다.

미꾸라지는 2시간 이상 푹 삶고, 무청 시래기도 2시간가량 삶는다. 삶은 미꾸라지를 곱게 갈아 시래기와 양념을 넣고 다시 푹 고아내는 밑작업에만 5시간 이상이 걸린다.

소 사장이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간’이다.

20년 넘게 그는 매일 아침 입안을 깨끗이 헹군 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국물의 간을 본다. 고추와 된장 등 식재료는 계절과 수확 시기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소 사장은 “매일 같은 맛을 내기 위해서는 매일 맛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맛의 변화를 세심하게 살핀 덕분에 20년 넘게 손님에게 “음식이 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

김치도 직접 담근다. 무안에서 나는 양파와 마늘 등 지역 농산물을 활용해 계절에 맞는 반찬을 차려낸다. 화려한 음식보다는 정갈하고 소박한 시골 밥상을 지향한다.

바삭한 미꾸라지튀김에 담긴 추억

추어탕과 함께 춘향골에서 빼놓을 수 없는 메뉴가 통미꾸라지튀김이다.

적당한 크기의 미꾸라지를 해금한 뒤 특제 튀김옷을 입혀 바삭하게 튀겨낸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 추어탕과 곁들여 먹기에 좋다. 칼칼한 맛을 좋아하는 손님을 위한 메기전골도 춘향골의 대표 메뉴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소 사장은 메뉴를 무작정 늘리기보다 한 가지 음식이라도 제대로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오랜 시간 한결같은 맛을 지켜온 비결이기도 하다.

춘향골에서 음식만큼 깊게 쌓인 것은 손님들과의 인연이다.

중년의 손님들이 한옥의 중문을 들어서며 “어릴 적 외갓집에 온 것 같다”고 말하는 일이 적지 않다. 돌담과 나무, 오래된 한옥이 어우러진 풍경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불러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춘향골을 찾았던 손님이 세월이 흘러 부모가 되어 자녀의 손을 잡고 다시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한때 젊은 골퍼였던 손님이 이제는 가족과 함께 한옥을 찾는 모습에서 소 사장은 자신의 식당도 손님들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음을 느낀다고 한다.

연로해져 언덕길을 오르기 힘든 단골손님도 있다. “주차장까지 음식을 가져다줄 수 없겠느냐”는 연락을 받으면 소 사장은 갓 끓인 추어탕과 미꾸라지튀김을 챙겨 직접 손님을 맞으러 나간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식사를 마친 단골들이 카운터 앞에서 서로 계산하겠다며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도 춘향골에서는 익숙한 풍경이다. 오랜 시간 얼굴을 마주해온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정겨운 모습이다.

춘향골은 그렇게 한 끼 식사를 하는 식당을 넘어, 잊고 지내던 고향의 풍경과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 됐다.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영원한 외갓집으로”

소숙경 사장은 춘향골을 시작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지난 세월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40대에 자식을 가르치려고 시작한 식당이지만, 제 청춘을 다 바친 삶의 터전입니다. 손에 화상 자국이 여러 군데 남을 만큼 고됐어도, 이곳이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영원한 외갓집’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현재 국립국악원에 재직 중인 딸이 언젠가 가업을 이어받아 이 한옥과 식당의 온기를 계속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도 간직하고 있다.

무안 청계면의 한 언덕배기에 자리한 오래된 한옥. 그곳에서 끓여내는 추어탕 한 그릇에는 남원에서 배워온 손맛과 무안의 농산물, 그리고 소숙경 사장이 20년 넘게 쌓아온 시간이 함께 담겨 있다.

한옥 마당을 지나 식탁에 앉아 따뜻한 추어탕 한 그릇을 마주하면 음식의 맛과 함께 오래된 집의 풍경, 그리고 사람의 정이 느껴진다.

춘향골은 그렇게 한 그릇의 추어탕에 맛과 공간, 그리고 사람의 기억까지 함께 담아내고 있다.

안채는 정원수에 둘러싸여 있어 한눈에 담기 어려울 만큼 아늑한 풍경을 자아낸다. 사진=임구빈
기둥과 대들보,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방에서 한옥 특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사진=임구빈
추어탕과 통미꾸라지튀김이 함께 차려진 한 상. 사진=임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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