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몽탄에 정착한 뒤 50여 년간 무안분청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정인수 세계명인. 사진=이병삼

1975년 몽탄에 ‘몽평요’ 세운 정인수 명인

무안군 몽탄면 몽강리. 영산강 물길을 따라 옹기를 실은 배가 드나들던 석정포구 가까이에 ‘몽평요’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반세기가 넘도록 흙을 만지고 가마의 불을 지켜온 사람이 분청사기 명인 정인수 씨다.

지난 20일 몽평요를 찾아 반세기 넘게 분청사기를 빚으며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발자취가 곧 현대 무안분청의 역사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 명인과 도자기의 인연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에서 자란 그는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서울지국에서 근무하던 중 도자기를 취재하면서 흙과 불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백자를 배우기도 했지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분청사기였다. 정형화된 아름다움보다 다소 투박하면서도 사람의 손맛과 마음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다는 점에 끌렸다.

“내 마음에 있는 것을 그릇 속에 담고 싶었습니다. 화려하고 멋진 것이 아니라 서민적이고 소탈한 한국인의 마음을 흙 속에 담고 싶었지요.”

그에게 분청은 단순한 그릇이 아니다. 서민적이고 소탈한 삶의 정서를 흙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분청사기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그는 말한다.

스물일곱 청년, 연고 없던 몽탄에 터를 잡다

1974년 무안을 찾은 정인수 명인은 이듬해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아무런 연고도 없던 몽탄면 몽강리 점촌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이곳에는 오랫동안 옹기를 만들어온 장인들이 살고 있었고, 옹기 작업장과 장작가마가 운영되고 있었다. 가까운 석정포구에는 옹기를 실어 나르는 배가 드나들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마을 사람들이 모두 흙을 만지고 살았습니다. 옹기를 만들고 배에 실어 나르는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었어요.”

그는 이곳에 ‘몽평요’를 세우고 전통 장작가마에 불을 지폈다. 이후 몽평요는 정 명인의 작업장이자 후배 도예인들이 전통가마와 분청사기를 배우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1975년 문을 연 몽평요. 전남에서 처음으로 전통가마를 갖추고 분청사기를 제작하며 현대 무안분청의 맥을 이어온 요장이다. 사진=이병삼

그의 도예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청담 한창문 사기장이다. 한창문은 몽평요에 머물며 정 명인에게 흙을 고르고 다루는 법부터 장작가마의 불을 다스리는 법까지 가르쳤다. 정 명인은 그에게서 전통 분청사기의 제작기법을 배웠다고 회고한다.

수천 번 도장을 찍고, 무심으로 붓을 긋다

정 명인이 오랜 세월 천착해 온 대표적인 작업은 인화문이다. 인화문은 그릇 표면에 작은 도장을 하나하나 찍어 문양을 만들고 백토로 분장하는 기법이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려면 수천 번의 손길이 필요할 만큼 많은 시간과 인내가 요구된다.

“남들이 힘들어서 잘 하지 않는 것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수천 번 도장을 찍는 동안 결국 자기 자신과 싸우게 됩니다.”

무안의 흙도 그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다. 정 명인은 무안 점토에 황토를 섞으면 태토와 흰 분장토의 대비가 살아나 인화문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그에게 무안의 흙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무안분청의 색과 질감을 만들어내는 뿌리다.

정인수 명인의 ‘인화국화문큰항아리분청’. 수많은 국화문을 일일이 찍어 완성한 정 명인의 대표작이다. 사진=몽평요 제공

인화문 못지않게 그가 사랑하는 기법은 귀얄이다. 귀얄에 백토를 묻혀 단숨에 그어낸 붓 자국에는 계산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살아 있다. 그는 이를 ‘무심 속의 유심’이라고 표현한다.

잘 만들겠다는 의식이 앞서면 선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워지고, 오랜 반복과 수련 끝에 무심하게 그은 한 획에서 비로소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나온다는 것이다. 한 번의 붓질 속에 장인이 살아온 시간과 마음이 스며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정인수 명인의 ‘조화문귀얄분청사기’. 귀얄로 단숨에 그어낸 자유로운 붓 자국에 ‘무심 속의 유심’을 담았다. 사진=이병삼

무안의 가마터에서 분청의 뿌리를 찾다

정 명인은 작품 제작에만 머물지 않았다. 무안 곳곳의 가마터를 살피고 자기 파편을 수집하는 한편 관련 문헌을 찾아 무안분청의 역사적 뿌리를 확인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그 과정에서 주목한 인물이 일제강점기 무안과 전남지역의 옛 자기를 조사했던 일본인 야마다 만키치로(山田萬吉郞, 1902~1992)다. 정 명인은 야마다의 저서 『미시마 하케메(三島刷毛目)』 등을 접하면서 일본 차 문화 속에서 무안지역 자기가 어떻게 인식되고 평가됐는지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일본에서 무안지역 자기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된 ‘무안모노(務安物)’와 반무지덤벙이다. 반무지덤벙은 그릇 전체를 백토물에 담그지 않고 일부 태토를 그대로 남겨 백색 분장면과 태토의 자연스러운 대비를 살리는 방식이다. 정 명인은 이를 무안분청의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법 가운데 하나로 본다.

그러나 그는 무안분청을 반무지덤벙 하나로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무안지역 여러 가마터에서는 인화문과 귀얄 등 다양한 분청 기법의 흔적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에게 무안분청은 특정 기법 하나가 아니라 오랜 세월 무안의 흙과 장인들이 함께 만들어온 도자문화다.

자신의 가마를 열어 후배들의 길을 만들다

정인수 명인의 도예 인생에서 눈여겨볼 또 하나의 대목은 ‘나눔’이다.

과거 도예계에서는 흙의 배합이나 유약, 가마의 불을 다루는 기술을 쉽게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정 명인은 몽평요의 가마를 후배들에게 열었다. 대학생들이 찾아오면 함께 불을 때고 작업하도록 했으며, 자신이 익힌 기술도 감추지 않았다.

조선대와 동신대 학생들을 비롯해 많은 후배 도예인들이 몽평요에서 전통가마와 분청사기를 경험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여러 도예가 역시 몽평요를 거쳐 갔다.

“혼자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전통이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배우고 함께 가야 합니다.”

2005년 그는 분청사기 분야 대한명인으로 선정됐고, 2013년에는 세계명인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명예를 얻기 위해 흙을 만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명인 선정 제안도 처음에는 사양했다가 여러 차례 권유를 받은 뒤 받아들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명인’이라는 이름보다 여전히 흙을 만지고 가마에 불을 지피는 일이다.

1975년 몽강마을에 축조한 옛 가마는 그대로 남아 있고, 현재는 이전한 몽평요의 새 가마에서 분청사기를 굽는다. 사진=몽평요 제공

“무안분청 박물관 하나는 있어야 합니다”

반세기 넘게 무안의 흙을 만져온 정 명인의 시선은 이제 자신보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향하고 있다.

그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무안 곳곳에 분청사기 가마터와 자기 파편 등 역사적 흔적이 남아 있는데도 이를 체계적으로 수집·연구하고 보여줄 공간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는 무안분청사기 박물관이나 전문 전시·체험공간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단순히 유물을 진열하는 박물관에 그치지 않고 방문객이 직접 흙을 만지고 인화문을 찍으며 분청사기를 이해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어야 한다는 구상이다.

몽강리에 남아 있는 옛 옹기 가마터 보존도 그의 숙원이다. 정 명인은 오랜 역사를 지닌 옹기 가마터를 직접 인수해 지켜오다가 서용민 도예가에게 소유권을 넘겼다. 이 옹기 가마터의 주변을 잘 정비해 지역의 문화유산으로 남기는 것이 그의 꿈이다.

몽강마을에 남아 있는 옛 옹기가마. 무안의 도자문화와 생활사를 간직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사진=이병삼

그의 구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회산백련지와 몽탄지역 도예공방을 연결하고, 석정포구와 영산강 물길을 활용해 도자문화와 관광을 연계하자는 생각도 갖고 있다. 개별 공방의 생존을 넘어 지역 도예인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세기 흙을 빚어 다시 무안에 남기다

정인수 명인의 반세기 도예 인생에 화려한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작품이 가마 속에서 깨지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견뎌야 했다. 코로나19로 전시장이 어려움을 겪었고 큰 교통사고도 당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일을 “살아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흙 앞에 앉았다.

스물일곱 살 청년이 몽탄에 처음 들어왔을 때 보았던 옹기가마와 석정포구, 흙을 만지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가 지키고 남겨야 할 문화유산이 됐다.

“흙을 만지는 사람은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혼자 잘되는 것보다 함께 더불어 가야 합니다.”

정인수 명인에게 선구자의 길은 남보다 먼저 가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신의 가마를 열어 후배들이 걸어갈 길을 만들고, 사라져가는 옹기가마를 지키며, 무안의 흙에 담긴 역사를 다음 세대에 건네는 일까지 포함한다.

반세기 동안 흙과 불을 지켜온 노장인의 바람은 소박하면서도 분명하다. 무안분청이 과거의 유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무안에서 계속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직접 만지고 배우며,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정인수 명인이 지금도 가마의 불을 놓지 않는 이유다.

 

❉ 분청사기장 정인수 명인 약력

개인전 10회/그룹전 25회/일본 교류전 10회

1975년 몽평요 설립

1979년 목포 도자공예 강사

1982년 한국 예술대상전 초대작가

1982년 한국 예술전람회 추천작가

1997년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1기)

2005년 대한명인(분청사기) 05-26호

2013년 세계명인 선정

2021년 백년소공인 선정

작품소장; 일본 오사카 문화원, 중국하남성 미술관, 귀주 차 박물관

대한명인회 부회장 10년 (역임)

세계명인회 대표단 2기 대표 (역임)

현)세계명인회 대표단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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