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취재=양기홍·이병삼 기자] 코끝을 먼저 스치는 건 짙은 흙내음이다. 뒤이어 영산강의 비릿한 물바람이 몽탄면 명산리의 적막을 깨운다. 한때 육중한 철마가 대지를 울리며 포효했을 이곳에는 이제 파릇한 나물들이 돋아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발밑으로 길게 이어진 노반(路盤)의 흔적만이, 이곳이 한때 뜨거운 철길이었음을 묵묵히 증언할 뿐이다.
1913년, 증기기관차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호남선이 무안의 심장을 가르기 시작했다. 그 길은 누군가에게는 쌀과 면화를 빼앗기는 수탈의 통로였고, 또 누군가에게는 가난한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유일한 비상구였다. 110년 세월 동안 무안의 희로애락을 실어 나른 철길. 이제는 사라진 역 터와 버려진 터널 앞에서 우리는 잊힌 기억을 복원하고, 그 토대 위에 무안의 내일을 설계해 본다.
수탈의 동맥인가, 근대의 통로인가
20세기 초, 무안의 물류는 세 갈래로 흘렀다. 1910년 개통된 육로 ‘1등 도로’(국도 1호선의 전신), 그리고 목포와 영산포를 잇던 영산강 뱃길이었다.

하지만 무안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1913년 5월 15일 개통된 호남선(목포~학교역 구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철도가 당시 지역 중심지였던 무안읍을 비껴갔다는 사실이다. 대신 철길은 영산강변을 따라 사창–몽탄–명산–일로–임성리로 굽이굽이 이어졌다.
이 노선은 나주와 무안의 비옥한 들판에서 거둔 곡물을 목포항으로 빠르게 실어 나르기 위한 일제의 치밀한 계산이었다. ‘식민지 수탈의 동맥’이라는 아픈 이름 속에서도, 이 철길은 역설적으로 몽탄과 일로에 근대의 바람을 가장 먼저 불어넣는 창구가 되었다.
바다가 논이 된 ‘천지개벽’의 명암
철길이 지나는 ‘일로’는 일제강점기 무안에서 가장 격동적인 변화를 겪은 공간이다.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자방포 간척사업과 영화농장 조성 등 대규모 토목공사가 이어지며 갯벌은 광활한 농지로 변모했다. 말 그대로 ‘천지개벽’의 시대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20년 8월부터 간척공사를 시작해 약 78만 평의 농지를 조성했고, 일로역과 인접한 일로성당 인근에 지사를 두어 소작농을 직접 관리했다. 1925년 일본인 지주 히토미 로쿠타로(人見 鹿太郎)는 인의산에서 회도까지 약 2km의 방조제를 쌓아 100만 평 규모의 영화농장을 만들었다. 농장 주변에는 외지 소작인들이 모여들며 새로운 마을이 형성됐고, ‘공수동’이 ‘농장마을’로 불리는 등 기존의 향토 질서는 완전히 재편되고 있었다.
꺾이지 않는 기개, 소작인의 눈물과 저항
농지가 넓어질수록 그곳을 일굴 노동력도 집중되었다. 1923년 기준 무안의 소작농은 1만9123명으로 전남에서 두 번째로 많았다. 역 주변으로 금융조합과 상점, 학교가 들어서며 오늘날 ‘일로’ 시가지의 기틀이 마련됐다. 역명이 삼향역에서 일로역으로 바뀌고, 중학교가 무안읍보다 먼저 ‘일로’에 세워진 것은 당시 무안의 경제 중심이 일로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번영의 이면에는 가혹한 수탈의 그늘이 짙었다. 자방포 들판과 영화농장은 그 상징적 공간이다. “영화농장에서 수확한 볏가마가 산더미처럼 쌓여 목포항으로 갔지. 그게 다 일본으로 건너가는 쌀이었어.” ‘일로읍 마을유래지’ 속 주민들의 회상처럼, 당시 철도는 배고픔의 통로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안 사람들은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다. 1926년 ‘소작인 불납동맹’과 1930년대 수리조합 설치 반대 시위는 ‘일로’ 사람들의 강단 있는 기개를 증명한다. “기차가 일로역에 들어서기만 하면 객실 안이 조용해졌다”는 일화는 부당함에 맞서던 지역민들의 서슬 퍼런 기세를 짐작게 한다.
통학열차의 추억, ‘몽탄의 힘’을 기르다
몽탄 사람들에게 철도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희망의 사다리였다. 한 면(面) 안에 사창·몽탄·명산역과 세 개의 터널이 공존했던 사례는 전국적으로도 드문 풍경이다.
검은 연기를 뿜던 통학열차는 몽탄의 인재들을 목포와 광주로 실어 날랐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책장을 넘기던 집념은 훗날 수많은 법관과 공직자를 배출한 ‘몽탄의 힘’이 되었다. 몽탄역 작은 철도박물관에서 만난 한 어르신은 옛 기억에 미소 지었다.

“기관사가 약속한 자리에서 슬쩍 석탄 덩어리를 던져주면, 아낙들이 술 한 사발로 고마움을 전했지. 그 석탄으로 겨울 아랫목을 데웠어.”
배고팠던 시절, 기차는 생존의 줄기였다. 무안의 젊은이들은 수탈의 철길 위에서 역설적으로 더 나은 미래를 길어 올리고 있었다.
다시 뛰는 ‘꿈 여울’, KTX 시대를 향하여
2001년 호남선 복선화로 명산역은 폐역이 되었고, 굽이치던 철길은 직선으로 펴졌다. 사창역터는 공원으로, 일로역터와 폐철로는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다만 명산역터와 폐터널이 여전히 방치되어 있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한때 이 공간들을 와인 저장고, 빛의 테마 공간, 레일바이크 코스로 활용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110년 철도 역사를 집대성할 아카이브 구축 제안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아이디어들이 구체적인 활용 방안으로 결실을 거두기를 기대한다.
이제 무안의 시선은 2027년 12월에 완공될 KTX 무안공항역으로 향한다. 공항과 KTX역이 직결되는 곳은 전국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과거의 철도가 수탈의 길에서 산업화의 동력으로 변모했다면, 미래의 고속철도는 전 세계인을 무안의 갯벌과 문화로 안내하는 ‘환대의 길’이 될 것이다.
영산강 물줄기를 따라 110년을 견뎌온 무안의 철길. 그 길은 이제 수탈의 기억을 넘어, 새로운 백 년의 꿈을 싣고 다시 달릴 준비를 마쳤다. 그 화려한 서막이 머지않았다.


![[ 감성·힐링 여행-무안의 기차역 ② ] 일로역서 시작하는 힐링여행](https://muan-senior.com/wp-content/uploads/2026/02/구일로역사-218x150.jpg)





![[무안 역의 기억들 ⑤ ] 철길 위서 길어 올린 무안 간이역 서사, 박관서 시인](https://muan-senior.com/wp-content/uploads/2026/03/역무원이던-시절의-박관서-시인-모습1-218x150.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