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 인화무늬 항아리 사진=국립중앙박물관

[공동취재 양기홍·이병삼 기자] 흔히 한국 미의 정수를 말할 때 우리는 고려청자의 신비로운 비색(翡色)이나 조선백자의 결점 없는 순백미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 화려한 미학 사이에서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질기디질긴 생명력을 뿜어내는 주인공이 있다. 바로 분청사기(粉靑沙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분청사기의 가치는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다. 거친 흙과 거침없는 도자 장인의 손길에서 탄생한 이 도자기를 지금 다시 조명할 필요가 있다.

시대의 격랑이 빚어낸 민족 자기의 탄생

분청사기는 고려라는 구질서가 저물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 체제가 형성되던 혼란기에 태어났다. 14세기 중엽, 고려의 국운은 급격히 기울고 있었다. 공민왕의 개혁은 좌절되었고, 해안가에는 왜구의 침탈이 끊이지 않았다.

국가 정책과 지방세력의 비호 아래 찬란하게 꽃피웠던 강진과 부안의 청자 가마는 왜구의 칼날 앞에 무너졌고, 생존의 기로에 선 도자 장인들은 정든 가마를 뒤로한 채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그들이 정착한 지역의 흙은 더 이상 기존의 비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통이 무너지면 그 자리에 새로운 문화가 싹트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정형화된 청자 제작의 틀에서 벗어나자 지역의 흙과 정서에 맞는 다양한 기법의 도자기가 탄생했다.

이 새로운 도자기는 조선이라는 신생 국가의 정서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도자기는 왕실과 중앙 관청에 공납되며 국가 통제 체계 안으로 편입되었지만, 전국에 흩어진 도자 장인들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었다. 그 틈에서 일반 백성들의 수요와 다양한 표현 방식이 살아났다. 이것이 분청사기 탄생의 서사다.

“분청사기는 결코 청자의 아류가 아닙니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도자 장인의 의식과 새로운 수요층인 지역의 정서와 결합해 탄생한 ‘독창적 변주’입니다.”

취재 중 만난 한 도자사학자의 말처럼, 분청사기는 15~16세기에 사용된 한국 도자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독창적인 도자기이다.

분청사기라 부르기까지

‘분청사기’라는 명칭은 정작 우리의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학계에서 이 용어가 사용된 지는 채 100년이 되지 않았다.

1941년,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잡지 『조광』에 발표한 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6세기 일본에서는 차문화의 발달과 함께 우리 분청사기를 ‘미시마(三島)’ 등으로 불렀다. 시즈오카현(靜岡縣) 미시마 신사의 달력 문양이 분청의 인화문과 닮았다는, 다소 일본 중심적인 명명이었다.

이에 문제의식을 느낀 고유섭은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는 명칭을 제안했고, 이것이 오늘날 ‘분청사기’로 줄여 불리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이름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 문화에 대한 주체성을 회복한 계기로 평가된다. 다만 ‘분청자’ 또는 ‘분장청자’가 더 적절하다는 견해도 여전히 존재한다.

엄격한 공납과 제작자 실명제

조선 초기의 공납제는 국가 재정의 핵심이었다. 국가 세금을 농산물, 해산물, 광물 등으로 현물 징수했는데, 도자기 역시 중요한 공납품의 하나였다.

조선시대 분청 가마터 분포도(김재열, 『백자·분청사기Ⅱ』 )

분청사기는 중앙 정부가 제시한 견본에 맞춰 제작되었으며, 일정한 규격과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졌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전국 자기소 139곳과 도기소 185곳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공납 자기가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또한 고려시대 대표적인 청자 생산지 20여 곳과 비교하면 분청사기가 비약적으로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품질 보증’과 ‘제작자 실명제’다. 1417년(태종 17)에는 관청 물품의 도난과 분실을 막기 위해 사용처를 새기게 했고, 1421년(세종 3)에는 그릇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지와 장인의 이름까지 기록하도록 했다. 당시 분청사기가 지배자들을 위해 제작된 그릇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엄격한 공납 규율은 역설적으로 분청사기의 품질을 끌어올리는 동력이 되었다. 도자 장인들은 문책을 피하기 위해 더욱 정성을 기울였고, 이는 세종 시대 ‘인화 분청’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분청에서 백자로

15세기 중반, 조선의 도자 문화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세조 대에 이르러 왕실의 취향이 백자로 바뀌었고, 1466년에는 백자가 왕실 전용으로 규정되었다.

이어 경기도 광주에 궁중 전용 가마인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 관요)’이 설치되면서 국가 도자기 생산 체계는 백자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 결과 분청사기는 중앙 무대에서 밀려나 지방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이러한 ‘소외’는 역설적으로 분청사기 제작에 자유를 부여했다. 국가 통제에서 벗어난 분청은 지방 관청과 지역민의 삶 속으로 깊숙이 스며든 것이다.

이 시기 분청사기는 지역적 특색과 사용자 취향을 반영하며 더욱 과감하고 해학적인 예술 세계를 펼친다. 경상도의 인화, 충청도의 철화, 전라도의 덤벙과 귀얄로 대표되는 지역 양식도 이때 완성되었다.

그렇다고 해당 지역에서 그 기법의 분청만 제작한 것은 아니다. 어느 가마터에서든 다양한 기법의 분청 파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일곱 가지 분청 기법은 전국적으로 공유되면서도 지역마다 개성적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생명력을 이어가던 분청사기는 16세기 전반에 접어들면서, 백자 기술의 보편화와 함께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장인의 손길로 빚어낸 일곱 가지 얼굴

분청사기의 표정은 하나가 아니다. 어떤 장인의 손길이 닿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미감을 드러낸다. 고려청자의 전통을 잇되, 조선 특유의 파격미로 완성된 일곱 가지 변주가 그것이다.

상감(象嵌)은 고려 상감청자의 전통을 계승한 기법으로, 표면을 파내고 백토나 자토(赭土, 붉은 흙으로 구우면 검은 색으로 변함)를 메워 넣는다. 정교함은 유지하면서도 문양은 한층 자유롭고 해학적으로 변모했다.

인화(印花)는 무늬가 새겨진 도장을 이용하여 무늬를 반복해 새기고 백토를 채워 넣는 방식이다. 균일한 품질을 유지하기에 적합해 공납용 도자기로 활용되었다.

조화(彫花)와 박지(剝地)는 선과 면의 대비를 통해 입체적 미감을 완성한다. 날카로운 선과 대담한 여백이 특징이다.

철화(鐵畵)는 붓으로 그려내는 회화적 기법이다. 산화철 안료가 만들어내는 검붉은 색감과 자유로운 필치는 분청 특유의 생동감을 극대화한다.

귀얄과 덤벙은 가장 자유로운 표현 방식이다. 귀얄은 거친 붓질의 흔적을 그대로 살리고, 덤벙은 백톳물에 담갔다 꺼내 자연스러운 흐름을 그대로 드러낸다. 특히 전라도 지역 가마에서는 이 기법을 통해 백자에 가까운 형태로 나아가려는 마지막 진화의 흔적이 확인된다.

왜 다시 무안분청인가

이제 분청의 긴 흐름을 따라 현재의 무안으로 시선을 옮긴다.

무안은 학계에 보고된 가마터만 22곳(분청 14, 백자 8)에 이른다. 여기에 옹기 가마터까지 더하면 고려 후기부터 현재까지 가마의 불이 끊이지 않은 지역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야마다 만키치로(山田萬吉郎; 1902~1991)가 무안 분청의 가치를 기록한 이후, 오늘날에도 많은 작가들이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청계농공단지의 생활자기 클러스터는 전국 생산량의 60%를 담당하며, 분청의 DNA가 현대 산업자기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전히 무안의 분청 가마터들은 체계적인 발굴과 보존을 기다리고 있다. 무안분청이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숨 쉬기 위해서는 보존과 계승을 넘어, 현대 생활 속에서의 새로운 활용 방안을 찾아야 한다.

무안시니어신문은 이번 호를 시작으로 10회에 걸쳐 무안분청의 발자취를 조명한다. 가마터에서 파편을 찾고, 장인의 거친 손마디를 기록하며, 현대 생활자기와의 접점을 모색할 것이다.

600년 전 이름 없는 장인들이 빚어낸 뜨거운 숨결, 그 시간을 따라가는 여정에 독자 여러분의 동행을 청한다.

분청사기 상감 구름 용무늬 항아리: 당당한 양감과 풍만한 형태가 돋보이는 대형 항아리로, 구름과 용무늬를 ‘상감’ 기법으로 장식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분청사기 인화 무늬 대접: ‘장흥고’라는 관사명이 새겨진 대접이다. 다양한 꽃무늬와 문양이 새겨진 도장을 도자기 표면에 반복적으로 찍은 뒤 백토를 입히는 방식으로, 이를 ‘인화’ 기법이라 한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분청사기 조화 연꽃 물고기무늬 병: ‘옥호춘(玉壺春)’이라 불리는 병에 귀얄붓으로 백토를 바른 뒤, 날카로운 도구로 물고기와 다양한 문양을 그려 넣은 것으로, 이를 ‘조화’ 기법이라 한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분청사기 박지 모란 넝쿨무늬 병: ‘옥호춘(玉壺春)’이라 불리는 병에 모란꽃과 넝쿨무늬를 그리고, 나머지 부분을 긁어내는 ‘박지’ 기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형태의 병은 특히 조선 초기에 유행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분청사기 철화 연꽃 물고기 무늬 병: 병 전체에 귀얄로 백토를 입힌 뒤, 몸체 중간에 짙은 갈색의 철화 안료로 물고기와 연꽃을 교대로 그려 넣은 것으로, 이를 ‘철화’ 기법이라 한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분청사기 귀얄무늬 대접: 돼지털이나 말총 등으로 만든 ‘귀얄’ 붓을 이용해 그릇 표면에 백토를 바르는 방식으로, 이를 ‘귀얄’ 기법이라 한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분청사기 분장 무늬 사발: 백토를 탄 물에 그릇을 담갔다가 꺼내는 방식으로, 이를 ‘덤벙’ 기법이라 한다. 굽다리를 잡고 거꾸로 담그기 때문에 백토가 묻지 않은 굽 언저리와 회청색 바탕이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