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동취재=최점주·박관섭·문윤진 기자] 전라남도 행정의 중심지이자 무안군의 비약적인 발전을 상징하는 남악신도시에는 화려한 스카이라인이 펼쳐져 있다.
비옥한 농경지를 품고 있던 무안의 땅 위에 거대한 도심이 세워지면서 지역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높이 솟은 아파트 숲과 넓은 아스팔트 도로 아래에는 고향을 통째로 내어주고 떠나야 했던 원주민들의 깊은 눈물과 애환이 묻혀 있다.
갯벌 위에 일군 삶의 터전
오늘날 전라남도의 행정 중심지로 우뚝 선 남악신도시는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논과 밭, 낮은 산자락 사이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농촌 마을이었다.
남악리에는 남악·신흥·회룡·오룡 등 자연마을이 자리했고, 주민들은 쌀과 보리, 마늘과 고추, 고구마 등을 재배하며 농사를 중심으로 공동체의 삶을 이어갔다.
남악의 역사는 신도시가 들어서기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악은 16세기부터 이주민들이 들어와 취락을 이루기 시작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남악리의 논은 상당 부분 갯벌을 개간하여 만들어진 농경지였다. 오랜 시간 사람들이 바다와 땅의 경계를 넓혀가며 일구어낸 농토였던 것이다.
이 마을의 원래 명칭은 남쪽에 있는 산이라는 뜻의 「남뫼」였으나, 이후 부르기 편한 음운을 따라서 「남메기」 또는 「나메기」라고 불리다가 남악리 등으로 마을이 커지면서 이를 구분하기 위해 「원남악」 등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들어 한자 지명이 정착하면서 「남악(南岳)」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는 1789년(정조 13)의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나주목 삼향면 남악리로 기록되었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남악신도시가 개발된 2005년 이후 옛 마을의 명칭은 점차 사라졌고, 현재는 도로명주소인 ‘남악 19로’로 불리고 있다.
1910년대 남악리의 논 가운데에는 김해 김씨와 해주 오씨 등 한국인 지주들의 토지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1930년대까지도 한국인 지주들의 토지 소유가 뚜렷하게 확인된다. 이는 남악의 농경지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땅이 아니라, 오랜 세월 지역 주민과 한국인 지주들이 삶과 생산의 기반으로 일구어온 땅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처럼 사람들이 오랜 세월 일구어 온 비옥한 땅을 바라보는 일본의 시선은 달랐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영산강 하류의 넓은 간석지와 농경지는 식민지 농업경영과 미곡 생산을 확대할 수 있는 경제적 공간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미 간척을 통해 농경지로 바뀐 땅은 안정적인 농업생산이 가능했고, 아직 남아 있던 넓은 간석지 역시 방조제와 간척공사를 통해 새로운 농지로 전환할 수 있었다. 일본은 당시 발달한 토목 기술을 이용해 갯벌을 막고 농지를 확대했으며, 무안 일로와 삼향 일대에서도 대규모 간척과 농장 조성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일본의 진출을 단순히 빈 땅을 개발한 과정으로 볼 수는 없다. 일본이 주목한 것은 이미 사람들이 삶의 터전으로 만들어 놓은 농경지와 아직 개발되지 않은 간석지가 지닌 높은 생산 가능성, 그리고 영산강 하류라는 지리적 조건이었다. 남악을 포함한 이 일대의 토지와 농업생산력은 식민지 경제체제 속에서 새로운 경제적 가치로 평가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남악의 땅에는 시대마다 서로 다른 시간이 겹쳐졌다. 갯벌을 막아 농토를 만들었던 사람들의 시간 위에 식민지 농업의 시간이 더해졌고, 해방 이후에는 다시 주민들의 농촌 생활이 이어졌다. 1987년 『마을유래지』에 32가구, 120명이 거주한 농촌 마을로 기록된 신흥마을은 그 시절 남악리 마을들의 모습을보여준다. 주민들은 쌀과 보리를 비롯해 마늘·고추·고구마 등을 재배하며 이웃과 함께 살아갔다.
도청 이전과 신도시 개발, 엇갈린 다섯 마을의 운명
남악의 운명이 다시 크게 바뀐 것은 전남도청 이전을 계기로 신도시 개발이 본격화되면서부터였다.
도청 이전 논의는 1990년대부터 시작됐으며, 1993년 무안군 삼향면 일대가 후보지로 선정된 데 이어 2000년 3월 남악신도시 마스터플랜이 확정됐다.
21세기 전남 발전 방향과 지방자치시대에 걸맞은 도청의 기능과 위상을 갖추기 위한 새로운 청사 입지로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가 선정되면서 신청사 건립이 추진됐다. 이후 2005년 11월 11일 전라남도청이 남악리에 공식 개청하면서 남악은 전라남도의 새로운 행정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회룡·신흥·남악·오룡 등 4개 마을이 도청 부지에 편입됐으며, 현재는 안동마을만 남아 옛 마을의 흔적을 이어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논밭과 집들이 있던 농촌의 풍경은 도로와 관공서, 아파트와 상업시설이 들어선 현대적인 도시공간으로 빠르게 바뀌었다. 개발사업이 2000년대이후 단계적으로 진행되면서 옛 마을의 공간과 생활환경에도 큰 변화가 닥쳤다. 마을의 논밭과 집들은 하나둘 도시의 건물과 도로로 바뀌었고, 옛 자연마을의 공동체도 해체됐다.
전남도청 이전과 신도시 조성이라는 거대한 지역 개발 논리 앞에 주민들은 대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을 내놓아야만 했다. 평화로운일상을 영위하던 촌락은 포클레인의 굉음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 개발의 흐름 속에서 무안의 전통 마을 가운데 원래의 모습과 공동체가 크게 변하거나 사라진 곳으로는 남악마을, 오룡마을, 회룡마을, 신흥마을, 그리고 안동마을을 들 수 있다. 다섯 마을은 모두 오늘날 남악신도시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옛 자연마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신흥·회룡·오룡·남악은 남악리 일대의 옛 마을이고, 안동마을은 현재 삼향읍이 아닌 인접한 일로읍 오룡리 쪽의 옛 마을이라는 점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신흥마을은 현재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무안청사·행정시설 일대로서, 도시개발로 옛 마을의 모습이 사라졌다.
회룡마을은 옛 마을 이름이 ‘남악회룡마을주공아파트’ 등의 명칭에 남아 ‘회룡’ 이라는 옛 지명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오룡마을 역시 ‘오룡마을 휴먼시아’와 ‘오룡지구’ 등의 명칭으로 이름을 전하고 있다.
남악마을은 마을 자체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오늘날 남악신도시의 중심 지명으로 살아 있다. 남악리의 대표적인 옛 자연마을이었던 이곳은 전남도청 이전과 신도시 개발을 거치면서 농경 중심의 마을에서 행정·주거 도시로 변화했다.
안동마을은 현재 일로읍 오룡리에 속해 남악·오룡 생활권과 교통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남악리의 옛 마을과 동일하게 설명하기보다는, 남악신도시 주변에서 개발의 영향을 함께 받은 인접 자연마을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결국 다섯 마을의 운명은 서로 엇갈린 채 아스라한 흔적만을 짐작하게 한다.
남악마을과 신흥마을은 옛 마을의 공간적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고, 오룡마을과 회룡마을은 지구 단위 명칭이나 아파트 이름으로 옛 지명을 이어주고 있다. 안동마을은 남악신도시 외곽의 인접 지역에 자리하면서 개발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옛 마을의 흔적을 일부 간직하고 있다.
다만 이름이 남았다고 해서 과거의 모습이 보존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옛 지명이 새로운 도시공간 속에서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잃어버린 고향, 기억으로 잇는 내일
고향을 잃은 시니어 세대에게 이 상실감은 치유하기 힘든 상처로 남아 있다. 명절이 되어도 찾아갈 고향집이 없고, 자식들에게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온전히 보여줄 수 없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깊은 상실감을 안겨준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북적이는 상권을 바라보면서도, 그 자리에서 벼를 베고 밭을 매던 옛 기억을 떠올리며 남몰래 눈시울을 붉히는 노인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가고 있다.
도청 뒤편에는 최근 새로운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고 있다. 이곳으로 이주해 새롭게 마을의 이장을 맡고 있는 안건수 이장은 “우리 마을은 아직 특정한 이름이 없는 마을이다. 현재 위치는 오룡마을에 해당하지만, 길 건너편 아파트가 ‘오룡마을 휴먼시아 아파트’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우리 마을은 어떤 이름을 사용해야 할지 지명위원회에 의뢰해 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한편 남악에서 나고 자란 남악리 오정현 이장의 어머니인 박덕순 어르신으로부터 남악의 옛 모습과 역사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올해 94세인 어르신은 남악의 변화와 마을의 옛이야기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러한 구술 기록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귀중한 역사 자료가 된다. 남악을 직접 기억하고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어르신들의 목소리가 점차 사라지기전에, 지금이라도 그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중요하다.
물론 도시의 팽창과 발전은 무안의 미래를 위해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농업을 기반으로 하던 무안군이 무안국제공항과 항공특화산업단지, 그리고 신도시를 아우르는 서남권 핵심 거점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변화와 진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눈부신 번영의 토대가 되어준 이들의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이름으로 남은 오룡과 회룡, 옛 마을의 공간적 흔적이 사라진 남악과 신흥, 개발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주변에 흔적을 간직한 안동의 역사는 단지 과거의 낡은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남악신도시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보여주는 무안의 진짜 뿌리다.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지금,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지워진 것들을 기억하고 보듬는 일은 진정한 지역사회의 성숙이자 고향을 내어준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그렇다면 도시의 물리적 팽창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원주민의 ‘공간적 상실’을 어떻게 위로하고, 사라진 다섯 마을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후세에 물려줄 수 있을까. 마을의 옛 지도를 복원하고, 주민들의 사진과 토지문서, 족보와 생활도구, 구술 기록을 모아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방법이 있다.
마을이 있던 자리에는 작은 표지석이나 기억의 길을 조성해 마을의 이름과 위치, 주민들의 삶을 기록할 수도 있다. 특히 생존해 있는 원주민들의 증언을 영상과 음성으로 남기는 일은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반드시 시작해야 할 작업이다. 이제 지역사회가 함께 그 해답을 찾아야 할 때다.
시대마다 남악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랐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이 땅이 지닌 공간적 가치였다.
이제는 그 공간에 깃든 역사에도 시선을 돌릴 때다. 사라진 마을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며, 후세가 그 역사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그것이 이 땅의 역사와 기억을 이어가는 가장 의미 있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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